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10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고 아내 앤드레아 미첼이 밝혔다. 미첼은 NBC 뉴스 기자로 활동하며, 그린스펀의 죽음 원인은 파킨슨병 합병증이라고 밝혔다.

그린스펀 경제 정책의 유산

그린스펀은 1987년부터 2006년까지 연준 의장을 맡으며, 아내는 그를 ‘수십 년간 양당 대통령 아래 미국 경제를 형성한 거인’이라고 평가했다. 그의 임기 동안 미국은 세대 최장 기간의 경제 성장을 이뤘다.

연준은 1일 성명을 내고 그린스펀의 정책과 경제 사고가 ‘이 기관, 경제학 분야, 그리고 미국에 영향을 미쳤다’고 밝혔다. 연준은 그린스펀이 ‘통화 정책에 엄격한 분석적 접근을 도입하고, 연준의 신뢰도를 확보하는 데 기여했다’고 덧붙였다.

초기 생애와 경력

그린스펀은 1926년 3월 6일 뉴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가구점에서 일하며 그를 혼자 키웠다. 경제학자가 되기 전, 그린스펀은 뉴욕 줄리어드 음악학교에서 클라리넷을 배운 뛰어난 음악가였다. 그는 재즈 색소포니스트 스탠 게츠와 함께 연주했고, 헨리 제롬 밴드와 투어를 했다.

동료 연주자들이 밤에 마리화나를 피우는 동안, 그린스펀은 경제학 공부와 밴드 회계를 맡았다. 19세에 뉴욕 대학에 경제학을 전공하며 등록했고, 자유시장 원칙을 옹호하며 경제 컨설턴트와 JP 모건 이사회원으로 활동했다.

그린스펀의 초기 경력은 우익 소설가 아이린 랜드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자본주의에 대한 랜드의 사상을 깊이 받아들여, 복지국가를 ‘생산적인 사회 구성원의 부를 압수하는 수단’이라고 말했다.

논란과 성찰

그린스펀의 연준 의장 임기는 성공과 논란이 공존했다. 1987년 주가 폭락 사태를 잘 대처한 점이 칭찬받았다. 그는 경제 기반에 대한 자신감으로 시장을 안정화시켰고, 저금리 정책으로 은행을 구제했다. 이 접근법은 나중에 ‘양적완화’로 불렸다.

그러나 비판자들은 그의 저금리 정책이 1990년대 말의 닷컴 버블과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은 그린스펀이 시장 과열을 억제하기 위해 금리를 올리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버블이 터지기 전까지 정리하려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9·11 테러 이후 그린스펀은 금리를 낮춰 경제를 지탱했고, 조지 W. 부시 대통령에게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라고 조언했다. 2006년, 그는 드문 다섯 임기 만료 후 연준에서 물러났다.

그해 말, 미국 주택 시장이 하락세를 보이면서 서브프라임 모기지 위기가 발생했고, 대공황 이후 최악의 글로벌 경제 침체를 유발했다. 비판자들은 9·11 이후 그린스펀의 저금리 정책이 주택 가격 급등과 은행의 위험한 대출 행태를 촉진했다고 지적했다. 은행 규제 회피와 파생상품 사용에 대한 그의 반대 역시 원인으로 꼽혔다.

2008년 10월, 그린스펀은 자유시장에 지나치게 신뢰를 두고 서브프라임 대출의 위험성을 간과했다고 인정했다. 그는 의회에 ‘금융 산업이 내 자유시장, 반규제적 사상을 틀렸다는 것을 증명했다. 나는 헛점을 발견했다. 얼마나 심각하고 영구한지는 모르겠지만, 그 사실은 매우 고통스럽다’고 말했다.

그린스펀의 개인 생활은 캐나다 예술가와의 짧은 첫 결혼과 TV 인사 바버라 Walters와의 관계를 포함했다. 1997년 앤드레아 미첼과 결혼했다. 일상 생활에서 그린스펀은 열정적인 테니스 선수로 알려졌으며, 검은색 진중한 정장을 즐겨 입어 ‘장의사’라는 별칭을 받았다.

그린스펀의 유산은 경제 성공과 심각한 도전을 모두 포함하는 복잡한 것이었다. 그는 회고록에서 클린턴 대통령의 ‘장기적 경제 성장에 대한 일관되고 철저한 집중’을 칭찬했으며, 일부 공화당 정부의 재정 규율 부족을 비판했다. 그의 미국 경제에 대한 영향은 수십 년 동안 기억될 것이다.